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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콩강 이야기 (18) / 특구 4 : 문명
문명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특구의 중심지들을 가보면 도시와 삶의 형태가 왠지 기형적이란 생각이 든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 끝자락, 마치 천연의 요새 같은 곳에 화려한 첨단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자연의 혜택을 받은 이곳에 교육기관이 먼저 세워져 생각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풍성하게 했어야 했는데,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탐욕이 잉태된 타락한 문명이 먼저 들어와 쾌락과 노동 없는 대가를 맛보게 했다. 병원이 먼저 세워져 사람들이 원시적 질병으로부터 치료 받고, 종교적 도덕성으로 서로 섬기고 나누는 기쁨을 맛보게 해야 했는데, 가장 무서운 문?의 병들이 먼저 들어와 그 바이러스를 퍼뜨렸고 카지노를 통해 땀 흘리지 않고 돈을 쉽게 버는 방법을 가르쳤다. 주변 환경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게 즐비한 고급 호텔과 식당들, 수많은 카지노의 네온사인, 최고급 방탄차들이 그것들을 웅변해 준다.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다스려 문명화 시킨다기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문명의 이기가 이곳을 지배한다고 볼 수 있다. 분명 이런 기형적 공간들과 편향된 문명에 절은 사람들의 행태가 대다수 원주민들에게는 낯설어 보일 것이다.
아?, 저녁 시장이나 간이 정류장 정도에서 원주민들의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을 뿐인데, 그들이 땀 흘려 정성스레 기른 가축과, 땀으로 젖은 노동으로 재배한 채소는 향락에 지친 소수에게 원주민들이 흘린 땀의 가치나 정성에 대한 생각 없이 너무도 쉽게 한순간에 소비되어진다. 아침 재래시장에 가면 이곳저곳에 사는 소수부족 아낙네들이 새벽잠을 설치고 먼 길을 걸어서 가져온 갖은 산나물과 야생 동물들이 시장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원래 그것들은 자기들이 먹고 살아가는 식량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특구가 조성되어 외부에서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밀려들어 오면서 그들의 식량은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벌어 돈의 가치를 값없이 사용하는 사람들의 건강 보강재가 되면서 소비가 급증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이 한 달에 한 마리 정도 잡던 야생 동물들을 하루에도 몇 마리씩 잡아 팔게 되면서 자연도 파괴되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진 돈들, 사실 원주민들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돈이란 종이에 불과한데, 그런 그들의 호주머니를 노리고 문명은 마약으로 그들을 유혹해 다시 그들의 돈을 회수해 간다. 검은 돈, 땀 흘리지 않고 노동의 대가 없이 거두어진 검은 돈의 악의적인 위력은 원주민들의 가정을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이른 아침 특구의 재래시장에 나와 있는 소수부족들의 아낙네들, 갓난아기들에게 젖을 물리면서 좌판을 지키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는 그들의 눈빛이 애처롭다. 아침 재래시장에서 그들의 먹을거리를 파느라 여념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놀라운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여자들이고 남자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젊은 여인네부터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일하는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금까지 선교를 하면서 알게 된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가정을 돌보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이 전도된 것이 소수부족이다. 문명화되면서 이런 삶의 구조가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심화되어가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인가? 미얀마 북부 산간지대를 다니다보면 짐을 들고 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일하러 가는 여인네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부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힘들다. 남자들이 가끔 보여도 그들 대부분은 무엇엔가 취한 듯이 비스듬히 앉아있거나 어슬렁거리며 걸어 다닐 뿐이다. 그들에게서 가족을 부양해야겠다는 책임감과 노동을 하려는 의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문명은 역사적으로 여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었다고 평가되고 있지만 이곳은 해방되기보다는 더 무거운 삶의 질곡으로 여인들의 삶에 족쇄를 채우고 있으니 도대체 문명의 힘이 어찌하여 다르게 작용되는지... 결국 땀과 수고가 바탕이 되지 않은 문명은 약한 자에게 야만적이 되는가 보다. 문명의 주체가 누구인지, 문화가 진보되지 않는 한 문명은 인간의 이기적인 산물로써 삶의 질적 변화가 아니라 퇴폐와 사회의 병적인 구조를 더 악화시키는 것인가 보다. 이런 파괴적 삶의 기형적 사이클이 돌아가는 곳이 특구의 삶이다. 그러던 것이 북경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중국의 이미지에 손상이 된다고 하루아침에 카지노도, 재래시장의 짭짤한 수입원이던 야생동물들 매매도 모두 철퇴를 맞았다. 이제 우리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 저주처럼 뿌려지는 문명병, 그것을 치료하는데 우리의 힘을 모아야겠다. 더 늦기 전에 이곳의 문화와 교육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우리의 작은 힘들을 모아야겠다. 글/사진 정도연 선교사 (cdy591@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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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동체이야기 / 남은 사람
지난 20년 동안 메콩강 공동체가 사역하는 메짠, 옴꺼이, 빠마쳀 공동체를 통해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12년 가까이, 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교육을 받고 나간 사람들이 대략 1500여명에 이른다. 그렇다고 그 모두가 모든 과정을 다 마친 것은 아니다. 어떤 기는 30여명이 들어왔는데, 모든 과정을 마치고 환영과 축하를 받으며 떠난 사람이 2명밖에 없다. 어떤 기는 20명에 1명만이 마친 경우도 있다. 감사한 것은 그래도 그들 중의 1/10은 변화가 되었든 안 되었든 간에 모든 과정을 인내한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다. 단일 부족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아닌 메짠 공동체의 경우, 종족별로떵 각각 다른 결과를 보인다. 분명 동일하게 기회를 주었는데도 민족적 자존감이 강한 Y와 M 종족의 경우는 모든 과정을 마친 사람들의 비율이 현저히 낮다. 문화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A와 RL 종족 남자들의 경우, 처음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는데, 초등 과정을 마치면서 약 60%가 탈락하고 남은 자들 중에서도 모든 과정을 마친 친구를 찾기가 참으로 어렵다. 한편 비교적 마지막까지 잘 견디어 낸 K와 YL 종족의 경우, 과정을 다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결국 지난 20여 년 동안 약 1500여명이 공동체? 통해 영육간의 삶을 함께 나누었지만 그중에 약 5-6% 정도만 나름대로 배운 바를 고민하며,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성공과 성취보다는 실패와 상처가 훨씬 더 많은 삶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들을 통해 나 자신이 다듬어지고 성숙해져 왔음을 알게 된다. 요즘은 이렇게도 생각해 본다.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선교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00여년 전에 나보다 먼저 온 서양 선교사들이 내가 사용한 방법보다 훨씬 더 탁월한 방법들로 태국 소수부족들에게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꾺하지 않았던 그들인데, 이전 선교사들에 미치지 못한 선교의 방법으로 그들이 변화되리라고 기대한 나에게 교만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선교,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들 물어보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인내, 참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여 포기하지 않으면 최소한 \'나 자신의 변화\'는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선교가 아닐까? 한 번에 하나의 일만을 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가 선교 현장에서 소수부족들이 변화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뮳가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나는 나의 선교사역을 통해서 배운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소수부족들에게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동안 지치지 않으시고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내가 늙은 학생이 되어서도 선교 현장이라는 하나님의 교실에서 계속하여 배우는 것을 허락하시며 나를 고치시고 다듬으실 것이다. 훗날 나의 호흡이 다하여 주님을 뵙는 그 순간에 "잘하였도다. 나의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해주시기를, 그때까지 나를 변화시켜주실 주님을 기대하며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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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름다운 이야기 / 주은교회(인천 부평구 갈산동 369 ) 장봉창 목사 (011-793-0867)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 20평 미만의 공간에서 목사님과 사모님,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과 초등학생인 딸, 네 식구의 가정생활 공간에서 교회를 개척하면서 당차게 세계 선교를 비전으로 품고 시작한 교회가 있었다. 부평에 있는 주은교회 장봉창 목사님의 삶이다. 오래도록 장로로 교회를 섬기시다가 뜻을 가지고 목회자의 길을 가시고자, 나름대로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신학교에 입학하셨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회 개척을 시작하셨다. 건물 임대료는커녕 하루 세 끼를 염려해야 하는 극한 상황쳀었지만, 첫 출발의 의지를 꺾고 싶지 않아 매월 책정한 선교비를 보내셨다. 장목사님은 그때를 회상하시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은 내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신학을 택한 이유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이기에 흔들릴 수 없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처음 주은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이제 지하 생활에서 그 건물 3층으로 이사한 이후였다. 그동안 교회가 성장해 한 20여명 모일 무렵이었다. 바로 옆 칸은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장소가 있었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그 옆을 통과해야 했다. 여전히 네 식구의 가정생활 공간도 3층의 일부를 막아 사용하고 계셨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사춘기를 지나고 대학생이 된 아들과 사모님이 이제 중학생이 된 딸아이의 반주에 맞춰 찬양을 인도하셨다. 어디서 그러한 울림과 자신감, 깊은 영감이 나오지... 그 어느 큰 교회의 세련된 찬양 팀보다도 훨씬 영감 있는 찬양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님께서 참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들려주셨다. 하루 종일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지하에서 3층으로 인도하시더니 이제 비록 오래되어 낡? 작은 아파트지만 그리로 이사하게 되어 사춘기 딸아이에게 방을 한 칸 주게 되었다고 감격해 하셨다. 그리고 고생한다며 이것저것 싸주시며 큰 교회에서도 받아보지 못한 선교비를 쥐어주시면서 "우리는 목사님께서 선교하시는 지역에 후원하면서 복 받은 교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런 선교비가 나에게는 거룩하고 커다란 영적 부담이다. 우리 선교부의 제1호 목사님이 된 데윗목사 일행이 주은교회를 탐방하고 받은 은혜와 사랑도 참 특별한 것이다. 치앙마이 제1교회 데윗목사와 일행은 태국에도 그와 같이 기도가 살아있고 사랑이 숨 쉬는 주은교회와 같은 교회를 목표로 사역하고 있다. 주은교회에서 새벽 늦은 시간까지 불렀던 찬양을 이곳에 흐르게 하고 싶다고 한다. 주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도 사랑을 나눌 것이라고 한다.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날 밤, 주은교회에서 받은 은혜를 기억한다고 한다. 선교사이다 보니 많은 교회를 방문하고 설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하지만 이 주은교회를 방문할 때는 분명 특별하다. 내가 살아난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왜 나는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지를 깨닫고 새롭게 다짐하게 된다. 이렇게 선교사는 은혜를 먹고 사는 영에 속한 사람이다. 이제 주은교회는 그 3층 절반을 교회 건물로 매입했다. 그리고 바로 붙어 있는 이단의 집회 장소까지 공간이 확장되어 더 많은 영혼들을 섬기기를 바라며 기도를 쉬지 않고 있다. 주은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바라보며 그곳에 부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며 내가 느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세례요한이 말한 신랑의 친구로서 느끼는 기쁨이 이런 것일까? 그들의 온전한 헌신으로 섬기는 나눔과 섬김은 분명 예수님께서 자랑하실만한 것이리라. 주은교회의 목사님과 모든 성도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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