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콩강 이야기 (19) / 카렌족의 60년 전쟁 - 1
언제나 동남아 밀림 지역에 우기 철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행해지는 처참한 살육이 있다. 멀쩡한 정신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해서 눈을 감아야했던 ‘람보4’의 화면이 그대로 자행되는 밀림의 총성과 비명이 있다. 미얀마에 정치적 변화가 있기에 올해는 좀 잠잠하려나 했는데 그 총성과 학살은 멈춰 서지 않았다. 지난 3주 전부터 2주간 계속된 무차별 공격을 피해 수많은 카렌족 난민들이 비좁은 태국 멜라 난민촌으로 밀려들었다. 유난히 자주 쏟아지는 많은 폭우가, 그렇게 흘려진 카렌족 전사와 부녀자들의 피를 씻어 주어 혈흔은 지워주었으나 살윈강과 에라와디 강물이 더욱 붉게 물들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는 카렌족의 남은 자들에게나 그들의 아픈 역사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말없이 흐르는 강물은 떠나보낸 자들의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1942년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 치하에서 2차 대전을 맞았다. 당시 동남아의 패권을 노리는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집어삼킬 야욕에 사로잡혀 미얀마를 침공하자 영국군과 함께 일본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종족이 카렌족이다. 그들은 영국군의 도움으로 \'거미 부대(spider units)\'를 창설해 정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카렌족은 영국으로부터 그들의 땅을 약속받았으나 2차 대전이 끝나고 온 세계에 일어난 독립의 물결에 밀려 영국군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미얀마를 떠나야 했다. 결국 카렌족은 약속받았던 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카렌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49년 자기가 살아온 땅에 툰구(Toungoo)라는 독립국을 선포하였다. 이후 미얀마의 내정이 복잡해지면서 군정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과 과거 역사에 얽힌 여러 이유들 때문에 카렌족은 총을 내려놓지 못하고 미얀마 군정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언 60여년의 세월 동안 카렌족들은 자유와 평화를 그리는 총성을 세계를 향해 밀림에 쏘아 올리고 있다.
그때부터 흩어지기 시작한 카렌족 난민은 주변 국가 태국에 세워진 난민촌을 비롯하여 영국, 미국, 아일랜드, 뉴질랜드 등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 채 살아가는 슬픈 민족사를 갖게 되었다. 미얀마 군정의 탄압으로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대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된 처형과 고통을 주는 행위는 수십 년간 은닉되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총을 들어야 하는 소수민족들의 투쟁의 역사가 언제 종지부를 찍고 총을 내려놓을 수 있을는지, 평화와 총의 불편한 역학관계가 이 밀림 속에서 해결되기를 기대하며 간절히 염원한다. 글.사진 / 정도연 선교사 (cdy591@hanmail.net) |
2. 공동체 이야기 / 초창기 공동체를 오가는 길
90년에 방콕에서 언어 공부를 하면서도 1주일에 한 번씩은 북쪽을 오가야 했다. 선배 선교사님이 이미 시작해 놓은 일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방콕 후아람퐁 역에서 기차를 탔다. 처음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관광객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신비롭고 재미있었다. 특별히 그 기차의 가장 좋은 침대칸은 대우 중공업에서 만든 것이어서 남들이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나 혼자만 느끼는 흐뭇함도 있었다. 한두 시간동안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을 바라보는 것에 지치면 승무원에게 자리를 1층과 2층으로 구분된 침대로 바꾸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자리에 누워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곤 하였다. 보통은 12시간 정도 걸리는데 가끔 비가 많이 내리거나 기계적 결함이 있으면 몇 시간씩 연장되기도 하였다. 한번은 비가 많이 내려 산사태가 일어나면서 철로가 유실되어 무려 19시간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 복구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차 안에 있던 식수와 먹을 것도 다 떨어졌다. 아무리 먹을 것을 찾고 물을 찾아보아도 기차 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물론, 주변에 마을 하나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쯤 되면 충분히 불평을 하고 큰소리가 나올 법 한데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철로가 협궤이다 보니 기차가 한국보다 흔들림이 훨씬 심해 기차 멀미를 심히 많이 하게 되는 것이었다. 만약 예약이 늦어져 침대칸 2층이라도 타는 날에는 다음날 일정에 많은 차질을 가져 올 정도로 멀미를 하였다. 치앙마이 역에 내리면 급히 서둘러 먼저 옴꺼이로 가는 미니버스가 있는 뿌라뚜남 시장까지 툭툭이나 쏭테우를 타고 가야했다. 하루에 한번 있는 그 버스를 놓치면 그 주에는 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연장되거나 어쩌다 멀미가 심해서 가지 못하게 되면 현지 교역자와 아이들은 그들대로 염려하였고 나는 나대로 현지를 궁금해 하여야 했다. 차 시간을 맞추다 보면 가끔 아침을 거른 채 버스에 오르기도 하였고, 새벽에 열리는 ‘재래시장\' 에서 이것저것 사들고 올라가 차안에서 먹곤 하였다. 그렇게 옴꺼이 공동체를 방문하고 다음날은 다시 메짠 공동체까지 가기 위해 새벽 6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메짠 공동체에 오후 3-4경에 도착해서 이것저것 둘러보고 기도하고 잠시 쉬었다가 밤 7-8시쯤에 다시 메짠에서 방콕까지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 일을 반복하였다. 메짠에서 방콕까지는 보통 11시간이 넘게 걸리다 보니 운전수가 2명이고 안내양 1명, 그리고 내부에 화장실도 있는 고속버스가 운행하였다. 장거리 손님들 위한 서비스도 다양했다. 비디오도 틀어주고 다과나 빵, 커피와 음료수는 물론 한밤중에 휴게소에 들려 쌀죽도 주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에어컨 조절장치가 없어 덮을 것을 마련하여 타지 않으면 그 긴 시간동안 에어컨의 심한 냉기로 인해 몸살이 날 지경이 되었다. 덮을 것이 없는 경우는 휴지로라도 에어컨 뢱멍을 막아야 했다. 그렇게 새벽에 방콕에 도착하면 나는 바로 언어 학교로 가서 학교 1층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세수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 이런 생활을 1년을 넘게 하다 보니 어느 순간 기차와 버스가 싫어졌다. 지금도 운전하는 것 외에는 차멀미를 하는 나에게 그 긴 기차 여행과 고속버스는 참으로 힘든 시간들이었다. 기차와 버스에서 새벽시장에서 산 음식을 먹다가 체하여 죽을 뻔한 일들... 거의 죽음과 같았던 방콕까지의 버스 탑승...지금 다시 그리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은 그때의 분주함과 열심들... 그 당시 매주 빠지지 않고 방콕과 치앙라이를 오갔던 그 열정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런 시간들을 통해 배웠던 태국의 다양한 문화들과 내가 섬기는 영혼에 대한 이해이다. 그때의 따뜻하고 순수했던 열정이 지난 6월 29일 내가 이 땅에서 20번째 Work Permit를 연장하게 하는 배경 속에 아직도 잠잠히 남아 있다. |
3. 아름다운 이야기 / 경희의료원 한마음 봉사단
세계 각처에, 소외되어 있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천사들이 있다. 1년에 한번 있는 황금 같은 휴가를 질병으로 인한 절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려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 더 열심히, 더 많이 공부하고, 더 절약했던 이꿀가 개인적으로 편안하게 누리고 살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웃들과 나누기 위함이었던 성숙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경희의료원 한마음 봉사단이 바로 그곳이다. 고(故) 김상렬 형제의 아름다운 마지막 삶이 연결 고리가 되어 만난 사람들로, 그 자신이 대장암의 사선을 넘어오신 조중생 선생님과 함께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인류애로 뭉친 의료 전문 봉사단체이다. 이분들과 함께 태국 북부 깊은 산속에 흩어져 사는 소수부족 형제들을 찾아 치?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벌써 네 차례이다. 의료 진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돕기 위해 4개 조로 나누어 깎아진 절벽 길을 지나 소수부족 마을을 찾아가기도 하고, 첨단 진료 장비가 있는 곳으로 차량을 동원해 불러내어 오기도 했다. 한마음 봉사단원들은 아직 한 번도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보지 못한 지역을 찾아가기 위해 비포장 길을 몇 시간씩 달리는 수고를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2006년엔 아주 특별한 팀을 구성했다. 소외된 지역에 살고 있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찾아내는 팀이었다. 한국에서부터 여러 첨단 장비를 준비해야 했고 의료진의 전문성도 더욱 치밀하게 준비하였다. 우리는 사전에 미리 준비해서 많은 의약품에 대한 세관 통과를 허락받았지만, 그날 담당 세관원의 트집으로 2시간이 지연되어 밤 늦은 시간에 진료지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불편은 의료봉사단원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라와족과 카렌족이 사는 메떰 지역과 카렌족 난민들이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모여 살고 있는 멜라 난민촌을 찾아가기 위해서 긴 시간 동안 이동하였고, 다음날 끝없는 산길을 7시간을 달려 멜라 캠프에 도착한 것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밤중이었다. 안내자가 없으면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입구를 통해 들어간 곳은 60년이란 세월 동안 전장에서 사라진 수많은 카렌족 전사들의 한이 서린 살윈강을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가로막아 그 슬픔의 역사를 잠시 가려주는 듯한 곳이었다. 생존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숨겨지고 싶은 듯이 마른 눈물을 삼키며 들어서 있는 그곳에 난민촌이 있었다. 동이 트자 새소리와 함께 찾아온 난민촌의 모습은 꿈과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라버린 눈물의 찌끼가 덕지덕지 붙은 화석이 되어버린 삶의 모습이었다. 난민촌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전쟁처럼 보였다. 티크나무 잎으로 만든 지붕이 처마 끝을 따라 길게 이어진 메마른 정경은 마치 슬픈 난민의 역사 이야기를 한마디 한마디 우리에게 들려주는 듯했다. 유난히도 습도가 많은 그날, 우리는 숨이 막히는 더위와 싸우며 하루에 약 천오백 명 정도를 진료했다. 그 진료기간 중 태국 카렌족과 라와족 지역에서 2명, 난민촌에서 3명의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를 찾았다. 태국 쪽에 있는 어린이 환자 중 3살짜리 ‘뿔라\'는 엄마 아빠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추운 겨울, 한국에 도착해서 많은 이들의 사랑의 기대를 받으며 수술에 성공하여 건강한 몸으로 자라고 있다. 다른 한명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 수술하기가 어려웠고 난민촌에 있는 어린이들은 한국으로 오는 것에 많은 법적인 제한이 있어 입양되는 조건으로 영국으로 가서 진료를 받게 되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휴식이 된 사람들, 사람을 위해 더 많이 공부하고 돈을 모으는 사람들, 완치의 가능성이 낮은 것에 대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한 어린 생명의 심장이 건강하게 뛰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쳀 모인 경희의료원 한마음 봉사단은 메콩강과 살윈강에 평화의 전조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사랑의 심장이 쿵쿵거리며 건강하게 뛰는 사람들, 이들의 사랑이 어린 병든 심장을 찾아 낫게 하며, 그 사랑이 방울방울 살윈강과 메콩강에 흘러들어 카렌족 전사들이 피 흘린 강물이 그리스도의 핏빛 사랑이 흐르는 강물이 되게 할 것이다.
생존을 보호받고자 마치 폭우에 젖어 떨고 있는 참새의 깃털 같은 모습의 난민촌을 보며 그들의 병든 육체뿐만 아니라 안식이 없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 않을 수 없었다. 이 땅에서 육신의 난민, 영혼의 난민이 하나도 없기를 기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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