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소식

  • 홈 >
  • 전국CE >
  • 선교소식
선교소식
메콩강 이야기 (20) / 카렌족의 60년 전쟁 (2) _ 그 이유들 운영자 2009-07-16
  • 추천 2
  • 댓글 0
  • 조회 1219

http://koreace.co.kr/bbs/bbsView/34/3930710

































\'\'


1.메콩강 이야기 (20) / 카렌족의 60년 전쟁 (2) _ 그 이유들



카렌족의 한이 맺힌 역사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에 의한 식민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영국은 미얀마를 세 차례에 걸쳐 정복한다. 1차 전쟁(1824-1826)에서는 Yandabu 조약 체결로 Arakan, Tenasserim 지방을, 2차 전쟁(1852-1853) 때는 남부 미얀마를, 그리고 3차 전쟁(1885-1886)으로 1886년 1월 1일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이렇게 정복자의 야욕을 채운 영국이 미얀마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사용한 정책이 민족 이간 정책이다. 강대국이 작은 나라들을 다스릴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민족 분열 정책이다. 영국은 미얀마 민족을 탄압하면서 동시에 카렌족을 일등 시민으로 부각시켰다. 그러자 미얀마족의 분노가 영국에서 카렌족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많은 카렌족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데 이것이 민족간의 갈등과 분열을 부르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기독교를 믿는 카렌족은 침략자 영국과 한 무리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상처 입은 민족주의와 종교적 감정이 결합된 형태로 미얀마 국민을 자극하여 군중의 분노를 응집시켰다. 1962년 사회주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은 카렌족을 국가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간주하였다. 다음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미얀마 침략이 카렌족의 역사에 한을 더하는 중요 요소로 등장한다.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군이 동남아시아를 하나씩 점령하면서 미얀마로 진격해 오자 미얀마의 약 70%를 차지하던 버마족은 독립의용군을 결성하고 일본군을 끌어들여 ‘영국-카렌’ 연합군을 물리치고 소수민족의 힘을 뺏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일본군이 버마를 완전 점령하자 미얀족은 카렌족의 교회를 불태우고 수많은 카렌족을 학살하는 피의 보복을 한다. 그러나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일본은 영국보다 더 악랄하게 착취를 자행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이 60년 동안 피를 마르지 않게 한 것이다. 이후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다시 영국이 미얀마를 통치하게 된다. 이때 아웅산 장군이-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의용군을 만들어 미얀마국방군을 창설하여 영국과 맞선다. 그때 아웅산은 소수민족들을 차별하지 않고 민족자치주로 인정한?는 버마연방공화국을 주창하는 빨롱협정을 하여 소수민족들의 지원을 받는다. 그러나 1947년 7월 19일, 독립을 눈앞에 두고 아웅산이 흉탄에 쓰러지므로 아웅산의 구상과 달리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안전한 독립을 1948년에 하게 된다. 그리고 그해 말, 미얀마 정부군이 카렌족을 영국의 앞잡이로 몰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카렌족을 비롯한 여러 소수민족들이 연합하여 무장봉기를 하게 된다. 그러다 1994년 소수민족연합의 거점이던 마너플라우가 함락되면서 힘이 약해진 몇몇 부족은 정부군과 휴전을 맺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카렌족은 아직도 태국 국경근처까지 몰린 채 치열하게 교전중이지만 중국이 미얀마의 군사정권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개입도 쉽지 않아졌다. 제국주의의 낡은 수레바퀴 밑에서 아직도 신음하고 있는 카렌족의 현재에서 인간의 욕심의 대가로 흘려진 피, 욕심 없는 어린 양의 피의 극명한 대립을 보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제국주의라는 원죄의 변형이 뿌린 죄의 결과는 최소한의 생존도 거부하고 계속하여 피의 대가지불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된 이 악의 변형은 ?속하여 결합과 변형을 시도할 것이며 이 변형의 끝이 어디일지 아무도 모른다. 글.사진 /정도연 선교사 (cdy591@hanmail.net)


\'\'


2.공동볃 이야기 / 옴꺼이 공동체





옴꺼이 군은 치앙마이의 서남쪽, 해발이 높은 산악지대에 위치한다. 미얀마의 카렌니주와 카렌주와 국경을 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렌족이 다른 종족에 비해 더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기후적으로도 태국에서 가장 추운 지역 중에 한 곳이다. 당시 옴꺼이와 치앙마이를 연결하는 교통망은 하루에 한번 있는 미니버스가 고작이었다. 이 지역에 선교적 기틀을 먼저 자리한 단체는 미국 늳침례 교단과 OMF이고, 그리고 홍콩 선교부가 차례로 들어와 이들 지역의 영혼들을 섬기게 되었다. 선교의 후발 주자인 우리는 외국의 여러 선배 선교사들이 땀 흘려 수고한 배경 위에서 선교를 시작하는 은혜를 누렸다. 당시 OMF 선교사가 그 지역에 거주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실제로 우리에게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는지를 알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선교할 때에 느껴지는 체감온도가 그분들의 영적인 체온 위에서 출발할 수 있는 감사한 기회를 얻었기에 오늘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선배 선교사님(황윤수 목사)의 수고로 약 5천 평 정도의 낮은 산 능선에 홍콩 한인교회의 도움으로 망고나무가 심겨져 있었고, 목조 건물이 하나 있는 이곳을 물려받았다. 그곳에서 내가 제일 먼저 접근한 것은 토마토를 심는 것이었다. 고원지대인 이곳에는 토마토가 잘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는 현지 책임자인 로이퍼 전도사와 함께 토마토를 심었다. 최선을 다했던 것 같은데, 수고한 노동의 대가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현지인과의 교감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90년 12월 성탄절을 맞아 한 달 이상을 걸어다니며 그 지역을 순회 전도하였다. 하루 9시간 정도를 걸어 이동하는 전도 여행 기간 중 갓 출산을 한 산모를 만났다. 당시 결혼은 했지만 아직 아이가 없던 내게 출산의 현장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비위행적인 환경에 놓인 산모와 신생아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 다지 깨끗하지 않은 담요에 갓 태어난 아이를 안고 와서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는데, 그 비위생적인 모습에 놀라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았다. 다음날 그 아이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지어 주었더니 아직 이름을 짓지 않은 다른 아이도 데리고 와서 이름을 지어 달라고 하여 두 명의 아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다음해 이곳을 방문한 사랑의 병원 선교회 일행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중에 한 전도사님이 이곳에 보건소를 지어 보자고 제안을 하셔서 보건소 건물과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다. 건물을 다 지은 후 헌당 예배를 드리려는데, 선배 선교사와 관계된 단체의 책임자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이후에 이 건물을 지은 사랑의 병원 선교회가 이 건물에 대해 권리 주장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속을 서류로 증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음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아 참으로 힘들었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우리네 인간의 연약함을 우려한 일종의 배려였다고 이해는 한다. 감사한 것은 그러한 제안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고 수용해준 사랑의 병원 선교회 관계자 분들의 넓은 헤아림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분들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결국 한국에서부터 이 건물은 사랑의 병원 선교회가 지어 000선교회에 일임한다는 내용의 스테인레스 판이 제작되어져 왔으며, 이 간판을 거실 벽에 붙이고서야 헌당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세워진 이곳, 보건소는 한국에서 온 의료 선교팀이 한 두 차례 진료하는 ?간으로 사용한 후, 생명이 길러지는 공간으로 그 역할이 바뀌어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


3.아름다운 이야기 / 우현철목사님과의 만남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많은 선후배 목사님들과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순간순간의 고비들을 넘겨 왔다. 그 여러 사건과 만남들 중에 아직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나를 교훈하는 몇몇 사건들이 있다. 당시에 손님들이 오시면 먼저 옴꺼이 지역을 둘러보고 그 다음에 메짠으로 가는 계획 속에서 방문 일정을 진행했다. 91년으로 기억한다. 임상목회 대학원과 사랑의 병원 선교회 관계자들 10여명이 공동체를 방문했다. 나는 먼저 옴꺼이 공동체를 방문하고 그날 밤 가까이에 있는 후에이콩 교회로 이동해 그곳에서 전도 집회를 하고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후에이콩 마을은 약 1시간 정도 산길과 계곡 위에 놓인 통나무 다리를 지나야 한다. 저녁을 먹고 호롱불 몇 개를 켜놓고 예배를 드리려는데 쪽지가 한 장 전달됐다. 그 단체의 총무를 맡으신 목사님께서 함께 오신 임원 목사님들을 배려하여 기도와, 설교, 축사, 인사말 등의 순서를 넣어 함께 오신 모든 목사님들께서 이곳 카렌족 성도들 앞에 각각 한 번씩 서실 수 있게 배솷한 새로운 예배 순서지였다. 참 많이 불편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지 않다고 생각되어진 나는 제대로 된 통역은 고사하고 사회를 보면서 감정 섞인 언어로 직언을 하고 말았다. \'이곳에서는 제가 책임자이니 제 말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인사를 하려고 모인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려고 모였습니다.\' 라고....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총무 목사님께서 \'아니, 선교회 회장 목사님과 임원들이 왔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냐?\'라고 호통을 치셨다. 나는 가만히 있지 않고 \'이곳에서는 제 말을 들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감정적으로 대꾸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내 생각이 옳다 해도 거기까지 찾아오신 분들에게 대해 젊은 혈기에서 나온 나의 말은 거칠고 당돌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 영문도 모르고 고성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본 현지 영혼들에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은혜로워야 할 전도 집회가 그렇게 서먹한 모습으로 겨우 마쳐졌다. 잠자리도 불편하고 날씨도, 마음도 유난히 추워서 밖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불을 쬐고 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두 분 목사님께서 내 곁으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정선교사, 그렇?고 기죽지 마, 우리가 다 책임지고 수습할게, 그리고 그 패기를 끝까지 가지고 사역하기를 바라네.\'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등을 토닥거려 주셨다. 인솔하신 회장 목사님을 제외한 모든 분들이 초면이었다. 당연히 그 두 분도 처음 뵙는 분들이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우현철 목사님과 김유찬 목사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얼마든지 혼낼 수 있고 후원 관계까지도 정리할 수 있는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은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기다려주시기로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분들의 인내와 사랑은 이 땅 구석뢱석에 녹아 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메콩강 이야기 (21) / 카렌족의 60년 전쟁 (3) - 안타까운 내부 분열 운영자 2009.07.21 2 1238
다음글 메콩강 이야기 (19) / 카렌족의 60년 전쟁 운영자 2009.07.06 2 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