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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강 이야기 (21) / 카렌족의 60년 전쟁 (3) - 안타까운 내부 분열 운영자 200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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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메콩강 이야기 (21) / 카렌족의 60년 전쟁 (3) - 안타까운 내부 분열


 


 


미얀마 독립사를 보면 국경지대에 사는 소수민족들의 속내는 사실상 영국으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이 아닌 미얀마로부터의 완전 독립이었다. 그래서 영국을 향한 독립 투쟁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민족주의의 길을 갔다. 소수의 인도계 이슬람 교도 M.A 라쉬드(Raschid)가 젊은 민족주의자로 좌편향적인 학생운동가 아웅산(Aungsan), 따낀누(Nu), 따낀 쪼니에인(KyawNyein)등과 함께 독립운동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할 때도 대다수의 샨족이나 까친족은 바라만 보았다. 그들의 완전 독립이란 꿈은 갑작스런 아웅산의 죽음과 이어지는 네윈의 군사독재 정권으로 인해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고 끈질긴 투쟁을 이어왔으나 이젠 내부 분열이란 악재로 점점 더 그 꿈으로부터 멀어져가는 듯하다. 오랜 병에 효자 없고 오랜 전쟁에 충신을 만나기 어렵다는 옛말처럼 긴긴 전쟁의 피로감 속에 그들 자체의 분열이 심각해지는 듯하다.


카렌반군은 미얀마내의 소수민족 반군 중 가장 유명하다. 카렌 국민연합(KNU : Karen National Union) 외 카렌 민족해방군(KNLA :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 카렌 평화군(KPA : Karen Peace Army), 신의 군대(God\'s Army) 등이 있으며 불교도 중심의 민주카렌불교군(DKBA : Democratic Karen Buddhist Army)이 있다. 이렇게 무장 세력의 명령권 주체가 서로 다르다보니 카렌반군 내에 갈등이 존재하고 그 갈등을 이용해 이간하는 세력이 있다. 카렌반군 중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면에서도 크게 미얀마 군정을 상대로 자치권 확대를 추구하며 수십 년간 무장투쟁을 벌여온 반군이 KNU이다. 미얀마 내 10여개의 큰 반군들 중 지난 88년 이래 대다수 반군 단체들쳀 군정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지만 KNU는 무장해제를 명기한 휴전 협정을 거부한 채 저항하고 있는 마지막 남은 소수민족 반군 단체로 1948년 이래 지금까지 계속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다. 적은 언제나 내부의 분열을 원하는데 카렌족은 종교적으로 그 불씨를 안고 있었다. 카렌족은 오랜 영국의 지배 아래서 기독교 인구가 많은 종족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KNU 내부도 기독교 리더십이 많았다. ‘전자현미경\'이란 별명을 가진 미얀마 군부 정보기관이 이것을 간과할리 없었다. 결국 미얀마 군정은 KNU와 민주카렌불교군(DKBA)의 감정의 골을 깊게 파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이탈한 DKBA가 정부군과 연합하여 KNU에 대한 공격과 인권 탄압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8년 2월 카렌족의 주요 지도자인 만 샤 라르 판 카렌민족연맹 사무총장이 국경에 인접한 마에소트의 자택에서 무장 괴한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의 배후에 카렌족 내의 다른 단체가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카렌족의 오랜 세월 동안의 전쟁에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1995년 1월 25일 정부군에 밀려 47년 동안 지켜온 요새, 마너쁠로오를 내줄 때도, 1997년2월 KNU·소탕 작전으로 500명이 투항하고 수만 명의 난민이 타이로 탈출하는 배경에도 내부의 분열을 첫 번째 이유로 꼽는다. 더욱이 지난 6월, 정부군의 2주간에 걸친 대대적인 공습으로 97년 이후 12년 만에 가장 많은 난민인 약7천여 명(지상파는 3600명이라고 함)이 태국 국경을 넘어 탈출해 와야 했던 사건의 배후도 내부 분열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수십 년간 전쟁에 지친 저들을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공포와 협박으로 이간해 피를 흘리게 하는 데에 종교가 이용되고 있다. 현재 KNU는 1977년부터 KNU의 최고 사령관 직을 수행해오던 지도자 보미야가 지난 2006년 12월 24일 고령으로 사망한 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그의 아들 너다미야가 돌아와 한 군단을 맡아 새로운 최고사령관 땀라투와 함께 리더십을 키워가고 있다. 또한 미얀마 군정은 지난해 새 헌법 채택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오는 2010년 총선을 치르겠다고 발표하는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이다. 카렌족들이 정파와 종교, 서로의 이기적 생각을 내려놓고 더욱 단결하여 60년에 걸친 피 흘림이 멈추어지는 그날, 카렌족의 시계와 순결을 상징하는 그들의 하얀 옷에 물든 붉은 핏자국이 씻기는 그날을 그려본다. 글 / 정도연 선교사 (cdy591@hanmail.net)

 


2. 공동체 이야기 / 오픈 공동체 (1)


 


 


보게 하라, 듣게 하라, 체험하여 느끼게 하라, 그리고 도전하게 하라, 들려주지 않고 보여주지 않아 멀쩡한 바보로 만들지 마라, 최대한 잘 먹이고 많은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어 바르게 알게 하라, 편견의 사각 속에 갇히지 않게 하라, 찾아온 손님으로 인해 천국의 잔치를 맛보게 하라, 현지인으로 하여금 궁색한 모습 보이지 않게 하라, 만약 실망하여 넘어지는 사람쳀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배경이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라.


우리는 단일민족으로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우리 민족과 국가의 자랑으로 여기도록 배워왔다. 지금은 너도나도 세계화를 부르짖는다. 우리의 자랑과 세계화에는 큰 괴리가 있다. 민족도 언어도 문화도 하나라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었는데, 세계화란 다양성을 전제로 서로 다른 것을 이해하고 관용하고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일성을 자랑으로 삼던 한민족에게 세계화란 추세 속에서 단일성은 극복하여 넘어? 할 장애물이 되고 있다. 단일성은 자연스럽게 배타성과 우월성을 동반하기에 차이를 관용해야 하는 세계화와 평행선상에 있다. 특히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 생각과 보는 것, 그리고 느끼고 판단하는 폭을 단일화 시켰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리다고 전제하고 접근하는 것과 또 다른 면이라고 인정하며 대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 결과 또한 예측하기 불가능하다. 이러한 다양성과 공존을 전제로 하는 패러다임은 한국 선교 현장에도 새로운 시각과 교정된 관점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선교 현장에 나가기 시작한지 50년-1955년 4월 25일 최찬영 선교사를 태국으로 첫 파송-을 넘어섰다. 그런 우리 한국 선교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단일 민족, 언어, 문화의 한계를 인정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나름대로의 소명의식과 열정도 있으나 우리에게 부족한 한 가지는 우리의 준비된 지식이 단일 문화적이라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한반도, 인종적으로 단일 민족, 문화적으로 하나의 언어권,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세의 침략 속에서 ?성된 피해 의식이 우리가 준비한 능력을 발휘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우리도 모르게 주종관계에 익숙하고 흑백 논리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것들이 고도성장의 동기가 되기도 했으나 이제 세계화라는 시장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특별히 상대방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관계 속에서만 나눔이 가능한 선교 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우리나라가 해외여행을 자유화하면서 선교는 새로운 방향을 맞는다. 특히 한국과 거리가 멀지않은 동남아와 중국·등은 한국 성도들의 선교지 방문과 단기 선교 팀을 맞는 것이 중요한 사역으로 등장한다. 이로 인해 일어난 부작용 또한 적지 않다. 이런 시대적 현상을 어떻게 지혜롭게 활용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우리 선교부의 경우 90년 초에는 국제 선교단체에 소속된 팀들이 주를 이루었고 가끔 목사님들이 그룹을 이루어 오신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90년 중반이 되면서 교회 팀들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이 되면서는 일반 사회단체나 대학, 중?고등학교와 공공 기관의 봉사 단체들도 오기 시작했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 미지쟀 세계에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나눔이라는 목적으로 온다. 문제는 모든 팀들이 저마다 준비를 하고 온다지만 자기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적은 경험 속에 고착된 신앙관과 믿음으로 그냥 열정적으로 사랑만하면 다 받아들여지고 용납되고 은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눈물을 흘리면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일방통행적인 메시지 전달과 방법에 의존하여 자기의 판단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상대의 문화에 대한 배려가 없이 내 것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의 섬김과 나눔은 섬김의 방법과 방향에 따라 사랑이 될 수 있고, 귀찮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나의 지식, 나의 신앙, 나의 방법이 옳다는 전제 아래 상대를 대하니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어야 할 형제간의 사랑과 섬김이 주종관계로 변질되는 것을 보게 된다. 나 또한 그런 유에서 조금도 예외일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현지인과 섬기러 온 분들의 중간에서 볼 수 있는 위치가 되면서 그동안 깨닫지 못한 부분에 대한 이해가 있게 되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받기만 하는 단기 선교나 봉사 냈동보다는 서로가 윈윈(Win-win)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나이 30에 처음 비행기를 타고 떠난 곳이 선교지이다. 내가 좀 더 빨리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 넓은 세상을 체험했더라면, 왜 내 주변에 나에게 그런 세계가 있다고 권해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이런 생각에 미치자 내가 만나는 사람은 먼 훗날 그런 아쉬움이 없도록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의 서두에 있는 슬로건은 오픈 공동체를 하게 되면서 나와 공동체 식구들이 새기고 있는 주제어이다. 많이 보고 생각쿇고 경험하여 자신과 주변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히지 않고 독수리가 날아오르듯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신실한 청년들을 길러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열정이 내 안에 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넓은 세상을 품고 세상을 이길 지혜와 지식과 의지를 가지고 전진해가기를 염원한다.

3. 아름다운 이야기 / 선배 황윤수 목사 - 나에게 선교를 가르치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사실 나는 선교를 몰랐고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모른다기보다 선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더 바른 표현이다. 신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선교학을 공부하긴 했어도 그냥 과목을 이수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신대원 3학년 마지막 학기, 그날도 선교사가 와서 예배를 인도한다는 광고를 보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11월이었으니 꽤 쌀쌀한 날씨였는데 선교사가 되기 위해 외대 힌두어과를 다니다 그만두고 신학교에 들어온 선교에 미친 후배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집에 찾아와 전화번호 하나를 주면서 오늘 예배를 인도하시는 선교사님이 꼭 나를 찾는 것 같았다는 말을 건네주고 갔다. 그 진실한 성의를 못 이겨 다음날 전화 한 통화 한 것이 내가 태국 선교사의 길로 ?어서게 된 동기가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당시 유행하던 007 가방 하나를 들고 선교지에 들어간 나를 꽃목걸이까지 준비하며 따뜻하게 맞아준 분이 선배이신 황윤수 목사님이다. 7년여의 선교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신 끝에 얻어진 건강 악화로 쉬어야 하는 입장에 계셨지만 나를 데리고 먼저 오신 선배 선교사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소개를 시켜 주고 이런 저런 조언을 듣게 해주셨다. 내가 비로소 마음을 열고 살아있는 선교학 강의를 진지하게 듣게 된 귀한 시간들이었다. 이것저것 언어공부를 할 때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시고 ?략적으로 메짠과 옴꺼이에서 진행중인 사역에 대한 설명을 마치시고 이제 안식년을 위해 공항으로 가시기 전에 진지한 표정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서 이야기를 꺼내셨다. “정 선교사, 부탁이 있는데 들어 주면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안식년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네. 이제 선교는 팀 사역을 해야 하는데, 팀 사역이란 사역지가 같고 행정을 함께 하는 것만이 아닌 재정, 경제까지도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온전한 팀 사역이 될 수 있네. 우리가 후원받은 재정까지 함께 한 장부를 사용했으면 좋겠네. 내가 태국을 떠나기 전에 이 부분을 정리하고 간다면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이것이 내가 처음 배운 선교학이다. 당시 나는 ‘예수사랑’이란 후원단체를 만들어 신대원을 같이 공부한 아버지 같은 장로님께 후원관리를 맡기고 왔던 터였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렇게 하자고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황윤수 선교사 후원회와 정도연 선교사 후원회가 하나가 되면서 동남아 선교회(South East Asia Mission)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 중에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 이야?가 하나 더 있다. “정선교사, 우리는 선교비 몇 푼 때문에 우는 소리하고 감정에 호소하지 맙시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떳떳한 선교사가 되어 봅시다.” 이 짧은 강의와 그가 보여준 명쾌한 모습이 나의 선교 철학의 골자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모금한 선교비를 함께 나누는 이 원칙을 지켜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그런 오해와 잡음들로 인해 몇 차례 고비를 맞기도 했으나 우리 메콩강 공동체가 오늘까지 20년이란 시간 동안 ? 중요한 뼈대를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건강한 철학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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