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소식

  • 홈 >
  • 전국CE >
  • 선교소식
선교소식
카렌족 60년 전쟁(5) - 왜 카렌족은 PANGLONG CONFERENCE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운영자 2009-08-17
  • 추천 2
  • 댓글 0
  • 조회 908

http://koreace.co.kr/bbs/bbsView/34/3930713
























\'\'

1. 메콩강 이야기 (23)


카렌족 60년 전쟁(5) - 왜 카렌족은 PANGLONG CONFERENCE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오늘날 미얀마의 복잡한 정치적 배후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수부족 반군들과의 사이에 얽힌 빵롱 협정(PANGLONG CONFERENCE - Supreme Council of the United Hills Peoples (SCOUHP)이 있다.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까지에는 북쪽의 국경을 따라 살고 있던 소수부족 중에서 비교적 큰 집단인 샨족과 카친족, 친족의 주요 역할이 있었다. 그 역할 분담의 동기는 젊은 리더 아웅산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여러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하고 진행할 때에 자주 샨 주의 타이야이족 리더와 협의했다. 그중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전력을 기울인 것이 국경 지대에 있는 소수부족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소수부족들이 연방 체제로 정권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그들의 힘을 결집시키고 세력을 얻었다. 1947년 2월 7일 빵롱에 샨족의 지도자들이 모였다. 거기서 샨 주의 대표들을 선임하고 부족민들의 여론을 모아 샨 주의 상징 깃발을 만들었다. 노란색과 연두색, 빨간색이 동일한 간격으로 나눠진 중앙에 하얀 원이 그려져 있다. 노란색은 동양의 유색인종을 뜻하고 연두색은 풍요롭고 풍성한 그들의 자연과 땅을, 붉은색은 용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중앙의 하얀색 원은 그 땅에 살아가는 백성들의 행복하고 밝은 얼굴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때부터 샨 주의 백성들은 2월 7일을 그들의 독립 기념일로 지정해서 축제를 연다. 1947년 2월 9일 빵롱을 방문한 미얀마의 젊은 리더 아웅산은 그 샨 주의 국기 앞에 경의를 표했다. 지금도 샨 주의 사람들은 미얀마 국기보다 샨 주의 기가 우선한다고 여기고 있다. 1947년 2월 12일 미얀마의 대표자 아웅산은 샨(shan)주와 카친(kachin)주, 친(chin)주의 대표와 함께 미얀마와 샨, 카친, 친족들이 서로 연합하여 10년 동안 연합 정부를 운영해 보다가, 서로 맞지 않으면 10년 후엔 연방 탈퇴를 명시한 빵롱 협정에 서명했다. 1947년 7월 19일 아침, 한 무리의 총잡이들이 아웅산이 각료회의를 주재하던, 양곤 중심부에 자리 한 행정부 본청에 있던 유엔 사무국 각료회의장에 난입해 일말의 오차도 없이 맡은바 임무를 재빠르게 수행했다. 그리고 1948년 1월 4일, 미얀마는 영국으로부터 불완전한 독립을 하게 된다. 샨 주와 카친, 친 주의 백성들은 그들과 맺은 빵롱 협정이 미얀마 독립의 중요한 증거 자료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서명이 없이는 결코 독립을 이룰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웅산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죽고 난 후 미얀마 정부는 빵롱 협정을 이행하기는커녕 오히려 소수민족들을 억압해 왔다. 대부분의 미얀마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물론 샨, 카친, 친 주의 사람들은 아웅산이 암살당해야 했던 원인으로 이 빵롱 협정을 언급한다. 10년 후엔 연방 탈퇴가 가능함을 명시한 내용 때문이다. 네윈을 중심으로 한 그룹들이 이 약속이 이행되는 것을 두려워해 결국 아웅산을 제거했다고 본다. 이러한 미얀마 정부의 약속 불이행이 여러 소수민족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태국과 중국의 국경을 등지고 깊은 밀림에 은둔하며 반군 활동을 하게 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지금도 샨, 카친, 친 족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미얀마 군사 정부를 향해 한결같이 빵롱 협정의 내용을 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다 1949년 마오쩌뚱의 홍기에 밀려 국민당 일부가 샨 주에 들어와 미얀마 정부군과 결탁해 양귀비를 재배하고 그런 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민병대 까꿰예(KKY :ka kwe Ye)를 창설해 지역을 통제하게 했으나 결국 그들 중에 쿤사(KhunSa)와 로싱한(Lo Hsing-Han) 같은 악명 높은 마약 상인들이 마약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군대를 이끌면서 미얀마의 북부는 더욱 복잡한 전장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싸움에 힘없고 약한 백성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어 탐욕과 권력욕에 유린당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들 중 어디에도 카렌족은 개입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달랐다. 미얀마와의 연합 정부가 아닌 완전 독립, 그렇지 않을 바엔 영연방으로 남기를 원했다. 무기를 든 목적과 요구 사항이 여타 소수부족과 다른 카렌족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이제 영국을 비롯한 서방이 그 답을 알려 줄 차례라고 본다. 카렌족들이 오랜 시간 기다려 온 백마를 탄 그들의 구세주 ‘톰메빠’ 가 되어 저 전쟁의 깊은 늪에서 건져내어 저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여 주기 바란다. 글.사진 / 정도연 선교? (cdy591@hanmail.net)

 


2.공동체 이야기 / 오픈 공동체 (3) - 궁극적인 목적, 팀 사역


 


오픈 공동체를 하게 되면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역 현장은 물론 알고 있는 모든 것을 100% 공개하기로 했다. 잘 먹고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현장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픈 공동체 기간에는 모든 현지 사역자들과 학생들이 한국과 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불편함을 즐기기로 했다. 평소 우리끼리 있을 때보다 더 좋은 환경과 음식들을 준비한다.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의 자존감이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또한 잠재능력을 발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다. 이제 선교 현장은 수많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향해 돛을 올리며 출발하는 항구가 되어야 한다. 평생을 땀 흘리며 성실하게 살아오신 어른들에게는 그들의 가치를 인정받는 공간으로 쓰임 받아야 한다. 선교 현장에서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지혜와 경험을 배우고 그것을 현장에 접목해 본 후 사회로 진출한다면 보다 다양하고 값있는 고용 창출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본다.


또 한편 오픈 공동체는 한국 교회나 선교 단체만을 위하지 않고 기독교를 믿지 않은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 전국 대학생 봉사단이나 각 초?중?고등학교, 또는 지방 자치 단체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기회를 주고받는 기간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희생하고 나누면서 얻어진 노하우와 경험들을 우리 젊은이들과도 나누어 그들로 하여금 더 넓은 세계를 보고 배워 가는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다면 이런 시간을 통해 그런 편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 기회로 자연스럽게 활용되기를 바람에서이다.


우리는 수평적 관계에서 참 많은 약함이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알리는 것은 잘 하지만 서로 알고 있는 관계에서 나눔은 약하다. 오픈 공동체의 궁극적인 소솸은 모든 한국 선교사님들이 서로 사역을 공개하여 중복 투자와 반복된 실수와 시행착오를 줄이자는 것이다. 2002년, 태국에 선교사로 입국한 순서대로 봉사해야 하는 주 태국 한인선교사회 회장을 맡아 섬기는 기회가 있었다. 임기 동안 진심으로 꼭 하고 싶었던 일은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사이버 공간에 자리를 마련해 그곳에 우리의 보고서만이라도 나누어 보자고 했는데 1년 동안 그 일에 동참한 선교사는 전체 선교사의 10분의 1도 채 되지 못했다. 당연히 임기 후에 그 일은 계속 이어지지 ?하고 사라졌다. 지금 선교 현장의 한 가지 문제는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사역을 하지만 서로의 사역에 대한 나눔이나 공개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복되는 사역이 많고 밟지 않아도 될 전철을 고스란히 밟아가는 물적, 인적 낭비가 많다는 것이다. 한국 선교사가 많아지면서 문화 탐방지나 공항, 터미널 등에서 다른 단기 방문자들을 인도하는 동료 선교사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아쉬운 점은 서로 인솔하고 있는 팀들에게 이분은 언제부터, 어느 지역에서, 이러한 사역을 해 오시는 선교사님이라고 서로 소개하기는커녕,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는 적이 많다는 것이다. 그냥 선교사들끼리 목례를 주고받는 정도로 만남의 현장을 지나간다. 소개를 하더라도 형식적 수준을 넘지 못하며 상대의 긍정적인 부분은 축소하고자 하는 모습이 역력하고 마주치는 것을 멋쩍어하는 것 같다. 가끔은 그 팀원들 중에서 먼저 나서서 이곳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시냐고 묻기까지 해도 그냥 모른 척 하는 경우도 있다. 참으로 어색한 모습들을 보일 때가 많다. 이제 한국 선교가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서로 모여 이야기하고 운동하고 식사하는 수준의 팀 사역에서 벗어나야 한다. 함께 모여 친교하고 운동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영적 구속 관계를 가지길 원한다. 우리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부분 부분의 지체인 우리는 합체되어야 마땅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분일 뿐이다. 같은 팀이 아니어도 하나님의 사역이란 것 때문에 내가 가진 소유를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평소 깊은 교제가 없었더라도 내가 알지 못한 면을 소유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디에서든지 겸손하게 소개해 주는 동역이길 바란다. 나에게 온 단기 사역자이기 때문에 특별히 별 할 일이 없어도 내 사역지와 집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선교사가 하는 사역지에 그의 재능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가 그곳에 쓰임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내가 지은 건물이기에 내 마음에 들고 내게 필요한 사람들과만 나누지 않고 공간이 필요한 모든 단체나 선교사에게 제공하여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기 원한다. 우선 필요하고 헌금이 준비되었다고 미래적 대책 없이 땅을 사고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설령 나와 불편한 관계일지라도 그가 가진 땅과 건물의 공간을 빌려 쓰고 공유할 줄도 알아야 한다. 누구의 도움이나 안내 없이 현장에 왔더라도 이미 그곳엔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씨 뿌림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자. 뜨거운 열정으로 열심히 달려 왔는데, 어느 날 그 지역에 나보다 먼저 와서 수고한 동역자가 있다는 것을 알면 찾아가 묻고 배우고 함께 공유하고 더 이상의 시행착오가 없도록 마음을 열어보자. 나의 관점에서 벗어나 우리를 부르신 이의 관점으로 서로 바라보고 돕는 동역이길 바란다.

 


3. 아름다운 이야기 / 메짠의 두엉팁 전도사 - 나에게 선교 현장을 가르쳐준 사람 (3)


 


 


 


마24:45-51에 보면 주인이 종에게 그 집 사람들과 양식을 함께 맡기며 그 재물로 맡겨주신 동료들을 때를 따라 잘 먹이고 돌보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이 종은 동료들은 때리고 그 양식으로 자기 맘에 드는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 그를 악한종이라고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벌에 처한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내가 바로 이 악한 종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메짠 지역에궼 주인이 나에게 맡긴 그 집 사람 중에 두엉팁 전도사가 있다. 그는 라후족 중에서도 노랑 라후족 출신으로 키는 작지만 5개의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다양한 경험을 소유한 자이다. 탁월한 운전 솜씨와 언어 구사 능력으로 정치적 성격이 있는 집단의 일에서부터 여러 서양 선교사들과 함께 일한 경력도 있고 한 한국 선교사와도 잠시 일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나는 혈기 왕성한 30세이었고 아직 아이도 없었는데 반해 두엉팁 전도사는 나보다 무려 9살이나 더 많고 슬하에 고등학교에 다니는 큰딸과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두고 아들을 원해 막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그는 나를 리더로 인정하고 참으로 잘 섬겨 주었다. 메짠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빠마이 공동체를 세워갈 때 험한 길보다는 뱃길을 더 많이 이용했다. 건기 철에 꼭강(Kok River)의 수위가 낮아지면 카누가 모래에 박혀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물로 뛰어내려 배를 밀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10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빨라 마을에 올라가 7시간 동안 전도 집회를 할 때에 그는 성령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많은 비로 산의 양 쪽이 무너져 내려 겨우 바퀴를 걸칠 정도의 산길에서도 주저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막 지나고 나자마자 큰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린 산을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던 순간도 있었다. 4륜구동의 정글용 픽업도 올라가기 힘든 높은 산길을 6톤 트럭을 승객용으로 개조한 차 위에 30명의 공동체 아이들을 태우고 후에이메리암 산길을 오르내리며 교회 개척을 함께 했던 헌신된 동역자였다. 메짠 공동체에서 16살 된 야빠가 양어장에서 시체로 발견되던 그날, 밤 11시 40분경에 그는 경찰과 협상하고 마을 주민들므 동원해 나를 외롭지 않도록 위로해 주었다.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소수부족들의 문화와 전통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는 그와 산길을 오르내리며, 또한 칠흑같이 어두운 밀림 속에서 호롱불을 켜 놓고 긴긴 밀림의 밤 동안에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이 많다. 그는 나에게 영혼들이 속한 문화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문화적 차이를 이해 못하고 아직 내 아이를 기른 경험이 없어서 그를 오해했던 일도 있다. 문을 반쯤 열고 비스듬히 앉아 손 인사를 하는 그의 모습이나 가장과 아빠로서 당연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리더로궼 공평하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다. 어느 순간 공동체에서 자라온 아이들이 하나 둘 리더로 세워지자 그는 자신의 자리를 그들에게 넘기고 홀연히 그가 필요한 또 다른 곳으로 갔다. 그의 탁월한 언어 능력을 발휘해 볼 수 있는 번역 선교회를 만나 자신의 부족, 노랑 라후족의 언어를 만들고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쓰임 받고 있다. 오늘의 나는 그가 남긴 많은 흔적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물가에서 노는 아이처럼 철모른 나를 그가 기다려주었다. 그가 없이 내가 어떻게 그 산과 골짝의 위험한 길들을 다닐 수 있었고, 20년 전, 아직 많은 거리낌이 남아있던 국경 지역, 메짠 공동체에서 살 용기를 가졌었겠는가? 내 평생 가는 길에 주께서 허락하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중의 하나인 두엉팁 전도사는 내게 위로와 담대함과 용기를 나누어 주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1. 메콩강이야기 (24) / 라후족의 전설(1) ㅡ 므어메미메 운영자 2009.08.17 2 949
다음글 메콩강이야기 (22) / 카렌족의 60년 전쟁 (4) - 카렌족의 전설 운영자 2009.07.28 2 1090